서울을 걸어보면 늘 비슷한 인상을 받곤 합니다.
거대하고, 빠르고, 잠들지 않는 도시.
하지만 조금만 발걸음을 비틀어 골목 사이로 들어가면
다른 서울이 조용히 숨어있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중에서도 益善洞(익선동)은 참 묘한 힘을 가진 동네입니다.
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오래된 채로 멈춰 있는 것도 아니고,
마치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투명한 공간 같은 느낌이랄까요.
누군가 일부러 단정하게 만들어놓은 관광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며 조금씩 덧칠해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걸으면 걸을수록 더 입체적인 동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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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지붕 아래에 겹겹이 쌓여 있는 기억들
益善洞을 처음 찾았던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도시의 기억도 이렇게 작고 낮은 공간에 남는구나.”
기와지붕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낮고,
건물 사이사이는 바람 한 줄기가 빠져나갈 정도의 여유만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저는 이런 구조가 오히려 이 동네를 보호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크게 짓지 못하니 투박하고,
비워둘 공간이 적으니 알뜰하게 살아남고,
그러다 보니 오래된 것들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는 동네죠.
서울의 많은 지역이 새로움으로 덧칠되는 동안
익선동은 ‘예전과 지금이 겹쳐지는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새로움이 아니라 ‘다름’을 배우게 되는 골목
요즘 도시 재생이라는 말은 흔해졌죠.
하지만 益善洞의 정취는 그런 트렌디한 이름으로 설명하기엔 조금 부족합니다.
이곳엔 디자인이든 음식이든 가게든
“잘 꾸몄다”는 느낌보다
“주인이 좋아하는 걸 꾸준히 해왔구나”라는 감정이 먼저 느껴지거든요.
한옥을 개조한 카페에서 마주한 진열장에는
대량생산 티가 나는 제품보다
수공예로 만든 작은 오브제들이 더 많이 놓여 있고,
골목 어딘가에 자리한 작은 레스토랑의 메뉴판은
대부분 직접 손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조금 덜 다듬어져도 넉넉하게 받아주는 분위기랄까요.
이런 공간을 걷다 보면
도시가 꼭 반짝여야만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낮보다는 저녁에, 저녁보다는 그 사이 시간에
개인적으로 益善洞이 가장 예쁜 시간은
낮도 아니고, 저녁도 아니고,
그 사이, 하늘이 완전히 파랗지도 어둡지도 않은 그 20~30분쯤입니다.
그 시간에는 기와지붕이 은은하게 윤이 돌고,
창문을 통해 흘러나오는 조명도 과하지 않아
골목 전체가 숨을 고르는 느낌이 들어요.
어떤 날은,
그냥 가만히 서서 벽에 기대 한숨 돌리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무도 특정한 목적 없이 이 공간을 돌아다니는 듯한
그 특유의 ‘여유로운 무게감’이 참 묘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죠.
사람 따라 흐르는 동네의 온도
益善洞의 골목을 걷다 보면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카페 거리에서는
친구들과 주말을 보내는 대학생들이 바쁘게 웃음을 나누고,
조금 더 깊숙한 골목에서는
혼자 조용히 산책하는 어르신들을 종종 마주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도 위화감 없이 어울려 있는 것이
이 동네의 힘이죠.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속도”라는 표현이 있다면
아마 익선동이 딱 그 속도를 보여주는 곳일 겁니다.
이 동네만의 방식으로 한 끼를 떠올리게 되는 순간들
익선동의 음식들은 좀 독특합니다.
일부러 특별해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게 아니라
그냥 주인의 개성이 그대로 담겨 있어요.
어떤 가게는
수년째 한 메뉴만 고집스럽게 만들고 있고,
다른 가게는
한옥 구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주방을 깜짝 놀랄 정도로 좁게 꾸며 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맛은 꽤 훌륭하고,
공간의 제약이 오히려 창의성을 더 자극한 듯한 결과물을 볼 때면
가끔은 감탄까지 나오죠.
“아, 이런 방식도 가능하구나” 하고요.
한옥과 네온사인이 어색하게도 잘 어울린다
이 말,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익선동에서는 전통과 현대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묘하게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한옥의 낮은 실루엣 위로
카페의 유리창 조명이 번쩍이는데도
전혀 산만하지 않아요.
오히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서울이 가진 복잡한 정체성이
이 동네에서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읽히는 느낌이랄까요.
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같은 속도로 흐르는 곳
익선동은 화려하거나 웅장한 공간이 아니고,
그렇다고 대규모 개발로 만들어진 신도시 같은 표정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살아 있는 동네’**이기 때문이겠죠.
새로운 카페가 들어와도
예전 가게의 벽돌이 그대로 남아 있고,
세련된 공간이 생겨도
바로 옆집에서 김치 담그는 냄새가 풍기기도 합니다.
어쩌면 익선동은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기억을
작은 단위로 잘게 쪼개서
사람들이 차분히 볼 수 있도록 펼쳐놓은 지도 같은 곳인지도 몰라요.
천천히 걷기 위해 떠나는, 아주 사소하지만 꼭 필요한 여행
익선동을 떠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 시간을 만들어주는 공간이
서울 한복판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공간이
생각보다 작은 골목 안에 들어 있다는 것.
그래서 익선동은 여행의 목적지가 되기도 하고,
잠시 숨 돌리러 들르는 쉼터가 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뭘 해야 해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천천히 걷고 싶어지는 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곳이죠.
끝으로, 당신이 찾게 될 익선동은 또 다른 모습일지도
아마 제가 본 益善洞과
당신이 걷게 될 익선동은 조금 다를 겁니다.
각자가 경험하는 골목의 온도와 소리,
머무는 속도,
들어가는 가게가 다르기 때문이죠.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서울이 가진 또 다른 얼굴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할 거라는 것.
그리고 그 얼굴은
지금까지 알던 서울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조금 더 인간적일 거예요.
